공포가 슬금슬금 기어오는 장미밭 대저택의 천진난만한 아가씨가 되었다.
여타 흔한 로맨스 판타지 주인공처럼 낯선 공간에서 눈을 뜬 주인공은 갑작스럽게 얻게 된 새로운 삶이 만족스럽기 그지없다. 과제에 시달리던 돈 없는 고아 고학생의 신분에서 넓은 장미 정원이 딸린 저택의 아름다운 상속녀라니. 내일 눈을 뜨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까 봐 겁이 날 지경이다. 붉은 머리의 미인 어머니뿐만 아니라 저택의 사용인들, 눈이 멀 만큼 엄청난 미남인 약혼자까지 모두가 주인공에게 사랑과 관심을 가득 주는 전형적인 로맨틱 판타지인 줄 알았다.
독살당할 뻔하기 전까지는.
하지만 내가 누구야! K-로맨틱 판타지 여주인공은 쉽게 죽지 않지. 해피 엔딩을 위한 시련은 남김없이 클리어해 주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소싯적에 읽었던 수많은 소설 속 클리셰를 숙지한 여주인공 앞에 돌파하지 못할 시련은 없다! 과연 여주 인공 로제는 각종 기괴한 사건이 벌어지는 장미 저택의 비밀을 해결하고 끝장나게 잘생긴 남자주인공과 석유 재벌로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사는 해피 엔딩을 맞이할 수 있을까?
크툴루 신화를 입은 나폴리탄 괴담의 유쾌하고 달콤한 변신
나폴리탄 괴담이라는 것이 있다. 일본의 유명한 전자게시판 사이트인 2ch를 중심으로 퍼지며 유명해진 인터넷 괴담으로, 어떤 사람이 일본식 스파게티 나폴리탄을 알 수 없는 레스토랑에서 먹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스파게티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내용을 아무런 해설도, 설명도 따로 붙이지 않고 미스터리 하게 서술하는 것이다. 이 괴담은 꽤 유명해져 이후에는 어떤 특정 존재나 현상에 대해 미스터리 하게 묘사하지만, 그에 대하여 별다른 설명이나 해석이 붙지 않고 그저 맥거핀으로 두며 찜찜하게 끝나는 종류의 괴담들을 대표하는 대명사로 사용되게 되었다. 이러한 나폴리탄 괴담의 핵심은 사건의 전말을 숨기고 읽는 이로 하여금 진실이 무엇인지 상상하게 하는 데 있다. 숨은 의미를 이해하려 할수록, 진실은 알 수 없고 그냥 오싹하고 기괴한 기분만 느끼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리고 이런 나폴리탄 괴담의 종류 중 규칙괴담이라고 불리는 괴담들이 있는데, 비일상적이고 기괴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나 일상을 지속하기 위해 사무적으로 행해야 하는 행동들에 대한 지침 또는 매뉴얼을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 특징이다. 오늘 소개하는 소설인 '로판인 줄 알았는데 괴담이다'가 바로 그러한 규칙괴담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소설 속 사건의 배경이 되는 장미 정원이 있는 저택의 사용인들에게 배부되는 지침서의 내용이 주인공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본편의 끝에 한두 개씩 붙어 나오는데, 독자로 하여금 아무것도 모르는 주인공의 시점에 몰입하여 읽다가 마지막에 사족처럼 첨부된 지침서의 내용을 보고 주인공의 행동이 지침과 반대된다는 것을 알게 되며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예지할 수 없게 된다. 그 내용이 꽤 기묘하고 오싹하기 때문에 여주인공의 시점은 쾌활하고 천진난만한 로맨틱 소설을 따르지만 정작 그 내용을 읽는 독자들은 괴담과 같은 반전되는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또한 나폴리탄 괴담뿐만 아니라 본 작품의 괴담적인 분위기를 극대화하는 요소는 크툴루 신화라고 불리는 가공의 코즈믹 호러 신화이다. 미국 대중 소설가인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가 시작하고, 어거스트 털레스가 정리한 이 기괴하며 오싹하고 잔혹한 외계 종족들에 대한 서사시는 인간의 관점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도, 인지할 수도 없는 압도적이며 초월적인 미지의 존재에 대한 공포심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크툴루 신화 속에서 묘사되는 끈적거리는 점액질을 질질 흘리는 촉수로 이루어진 기괴한 현상의 괴생물체들은 알 수 없는 심해 깊은 곳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으며 그들이 다시금 부활할 때 인류는 공포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절멸하게 될 것이라는 절망적인 미래상이 암시되어 있다.
인간이 압도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의 부활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사용되는 잔혹함은 본 작품에서도 남자주인공의 어린 시절을 묘사하거나 저택의 비밀을 설명할 때 단편적으로 서술되고 있는데, 크툴루 신화에 익숙한 독자들은 그런 차용된 요소들을 알아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일 수 있겠다.
본 작품은 1편과 2편을 서술하는 시점이 분명하게 나누어지는 편이다. 1편은 여주인공 로제의 시점으로 전개되며 로제 자신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넘어가지만 묘사된 글을 읽는 독자는 왠지 모를 께름칙함을 느끼는, 나폴리탄 괴담의 형식을 빌려와 서술되고 있다. 그 때문에 다소 전개가 엉성하게 느껴지며 글이 산만하기까지 하다. 이러한 특징들은 다행스럽게도 2편에서 대부분 해소가 되는 편이다. 2편은 계략을 일삼으며 미스터리한 일들을 일으키던 남자주인공의 시점에서 전개되는데, 친절하게도 1편에서 불친절하게 서술되었던 사건들의 전말을 알 수 있게 서술되었다. 대부분의 사건을 남주인공이 만들었기 때문에 남자주인공의 시점을 따라가기만 해도 알 수 없던 부분들이 대부분 해소되기 때문에 약간은 허무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본 작품의 정체성이 어디까지나 로맨틱 판타지 소설이기 때문에, 2편에서 남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며 변화하는 모습에 포인트를 둔다면 몰입하여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총평
100편 이내의 굉장히 잛은 단편 소설이다. 내용이 복잡하거나 진지하지 않기 때문에 가볍게 색다른 느낌을 즐기고 싶다면 추천한다. 자존감이 낮은 남주인공이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후회하며 여주인공에게 맹목적으로 되는 과정을 보는 것이 매력인 작품이다. 1편의 내용이 괴담의 형식을 차용하여 불친절한 묘사나 서술이 다소 있기 때문에 진입장벽이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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